[성화 이야기] 구리 뱀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약 1635년?1640년경 제작, 캔버스 위 유화, 186.4×264.5cm, 내셔널 갤러리, 영국 런던 이 작품은 오늘 제1독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왼편에는 모세가 서서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기둥에 매단 구리 뱀을 바라보라고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있다. 중앙과 오른편에는 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이(몸이 이미 푸른색으로 변함) 혹은, 죽어 가는 이들의 죽음에 절규하는인물 등 대혼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혼란의 와중에도 중앙의 한 여인은 검은 옷을 입은 채 뱀을 향해 눈을 떼지 않고 있는데, 그녀의 고요하고 결연한 시선은 두려움 속에 있던 자들을 압도하며 다른 이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모습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학자들은 이 여인이 루벤스가 매우 아꼈던 두 번째 아내, 엘레네 푸르망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단순한 성서 이야기의 재현을 넘어, 종교적 상징과 고대 신화를 겹겹이 담아낸 시각적 설교라 할 수 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구리 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미리 보여 주는 구약적 예표(豫表)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루벤스의 그림 속 구리 뱀은 단순한 구원의 도구를 넘어,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신학적 ‘징표’로 읽힌다. 뱀 자체의 상징성은 고대 문화 전반에 뿌리내려 있었는데, 뱀은 이집트에서는 태양과 왕권을 수호하는 신성한 존재였으며,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치유와 재생을 상징하기도 했다. 의학의 상징인 지팡이에 감긴 뱀은 바로 이 고대적 의미를 계승한 것이다. 중세에는 뱀이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죄, 죽음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루벤스의 그림 속 구리 뱀은 그 두 가지 상반된 의미 - 죽음과 치유, 심판과 구원 - 을 동시에 응축하여 표현하였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단순한 비극과 혼돈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죄와 절망 속에서도 ‘바라봄’을 통해 구원에 다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로크의 강렬한 색채와 인체의 표현을 통해, 루벤스는 ‘죽음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뱀을 ‘구원의 표징’으로 전환시키며, 관람자에게 신앙과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5년 9월 14일(다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군종주보 3면, 김은혜 엘리사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