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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교 위해 목숨 바친 참 사제, 그 열정 가슴에 새기다 2024-05-02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가 4월 16~21일 중국에서 진행한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땅에 남긴 흔적과 그 안에 담긴 신앙 열정을 추적하는 여정이었다. 서울 순교자현양위 부위원장 원종현(야고보) 신부가 이끄는 순례단은 약 190년 전 자신을 기다리는 양 떼를 찾아 조선에 입국하려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발자취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신앙이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달아 갔다. 순례단 앞에 불쑥 나타난 난관은 오히려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앙과 영성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지 마가자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번 순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다 선종한 마가자(馬架子, 마자쯔)였다. 중국 북동부 내몽골 자치구에 속한 마가자는 한적한 농촌으로 교우촌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가자성당이 이곳에 자리한다. 서만자(西灣子, 시완쯔)에서 약 1년간 사목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7일 조선에 보다 가까운 마가자를 향해 출발한 뒤 10월 19일 도착했다.


그러나 마가자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 선종하고 만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서만자에서 마가자로 이동하는 동안 다리가 부었다 가라앉는가 하면 동상에 걸렸고 두통에도 시달렸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결국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하느님께는 아마 다른 뜻이 있었던 것 같다. 


박해의 땅 조선 선교를 자처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의 용기 있는 죽음을 접한 파리 외방 전교회 모방 신부가 1836년 1월 13일 서양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했다. 같은 해 12월 31일 샤스탕 신부, 1837년 12월 18일 앵베르 주교가 조선 땅을 밟았다. 이들은 모두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해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에서 선종했지만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을 꽃피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지 당국 불허에 ‘마가자’ 찾지 못했지만
요하~심양~단동 이르는 유해 이송 경로 따르며
선교 여정 가득한 현장 돌아봐



순례단은 마가자성당 뒷산 방향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조성돼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무덤 자리와 묘비를 찾아 4월 17일 서만자성당에서 출발할 예정이었다. 정확한 이동 경로는 17일 오후 1시 서만자에서 출발해 392km 떨어진 적봉(赤峯, 츠펑)시에 오후 6시에 도착한 뒤 현지에서 1박을 하고 18일 오전 9시 적봉에서 마가자까지 106km를 이동해 오전 11시 즈음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마가자는 적봉시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


적봉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가 이 모든 계획을 뒤바꿔 놓았다. 현지 지방 정부가 한국 순례단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번 순례를 충실하게 진행하기 위해 원종현 신부와 서울 순교자현양위 신정주(요한) 팀장 등은 3월 13~18일 적봉교구와 마가자성당을 사전 답사하면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고 한국 순례단에게 식사도 직접 요리해 대접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은 터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순례단은 긴급하게 대책을 논의했지만 마가자로 가는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원 신부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자”며 “개척 과정에 있는 우리의 순례가 지속될 때 막힌 길이 열릴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하북성(河北省, 허베이) 승덕(承德, 청더)으로 목적지를 바꿔 17일 오후 6시경 여장을 푼 뒤, 남은 일정을 하느님께 의탁했다.



■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이송 경로를 따라


순례단은 1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승덕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요하(遼河, 랴오허)를 지나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가 잠시 안치됐던 심양(瀋陽, 선양)에 이르는 600km 가까이를 이동했다. 하루 종일 광활한 중국 대륙을 버스를 타고 통과하는 피곤한 여정 속에서도 기도 소리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를 공부하는 문답이 끊이지 않았다.


19일 하루 동안 심양의 역사 유적지와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서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낸 순례단은 20일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가 모셔진 열차가 지나갔던 변문(邊門, 비엔먼)과 단동(丹東, 단둥)을 향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심양에서 변문까지는 160km, 변문에서 단동까지는 30km 정도 거리다. 이 경로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살아서 조선에 입국했다면 거쳐 갔을 길이다.


변문 표지석이 세워져 있는 곳에서 잠시 내린 순례단은 감격에 휩싸였다. 그곳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그리고 조선 신자들이 박해자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중국을 왕래할 때 지나갔던 길목이었다. 또한 변문 표지석 바로 옆으로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에서 출발해 신의주를 거쳐 중국 대륙을 관통하던 철길이 있었다. 철길 위 기차를 보며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가 이 길을 지나는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버스가 단동시에 가까워질수록 순례단에는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감돌았다. 단동시 외곽은 시골 장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시내로 접어들자 고층 빌딩이 즐비했다. 드디어 낮 12시30분경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압록강철교와 북녘땅이 순례단의 시야에 들어오자 “아!” 하는 감탄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그토록 밟고 싶었던 조선 땅에 살아서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선종 96년 만에, 조선교구 설정 100년 만에 유해로서 압록강 철교를 건너 경성까지 이송된 뒤 1931년 10월 15일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된 내력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했다.


순례단은 손에 잡힐 듯한 북녘땅에 갈 수 없다는 안타까움을 굽이치는 압록강 물결에 남겨 놓고 오후 4시경 버스에 다시 올라 북녘 동포들과 중국교회 신자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며 심양으로 돌아왔다.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 마지막 날인 4월 21일 주일에는 심양대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오전 9시에 중국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주교좌성당 맞은편에 3층짜리 주교부(主敎府) 건물은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상자가 1931년 9월 17일 오후부터 9월 23일 심양역을 출발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역사적인 장소다.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상자는 심양-단동-신의주를 거쳐 9월 24일 오전 10시경 경성대목구 주교관(현 서울대교구 역사관)에 안치됐다. 이날 비로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생전에 그토록 갈망했던 조선에서 안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순례를 마친 서울 순교자현양회 이래은(데레사) 부회장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야말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알려져 있지 않던 시대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던 참 사제”라며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는 용기와 열정이 오늘의 사제들에게 필요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가톨릭신문 2024-05-02 오전 9:12:0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