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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 교회 첫 성인 103위 탄생 2024-04-30

1984년 5월 3일 교황 최초로 한국을 사목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려 땅에 친구(親口, 존경을 담은 입맞춤)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공


‘평화의 사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첫 방한

꼭 40년 전인 1984년 5월 6일 오전 10시 25분. 순교자들이 피로 신앙을 증거한 절두산과 새남터성지가 내다보이는 서울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려 새벽 4시부터 이곳에 모인 백만 신자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곤룡포(임금이 입던 옷)를 본뜬 황금빛 제의를 걸친 보편 교회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 ‘평화의 사도’ 성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교황이었다. 교황은 한국 전체 신자(180만 명) 중 절반이 넘는 인원 앞에서 라틴어로 103위 순교 복자의 시성을 선언했다. 평신도 92명(여성 47명·남성 45명)과 성직자 11명(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10명 포함)이 성인이 된 빛나는 순간이다.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증진을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권위로써, 또 내게 맡겨진 권한으로써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와 바오로 정하상 외 101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판정하고 결정하여 성인들 명부에 올리는 바이며 세계 교회 안에서 이분들을 다른 성인들과 함께 정성되이 공경하기를 명하는 바입니다.”

한국 교회 첫 성인 103위가 탄생한 순간, 우렁찬 팡파르와 신자들의 환호·박수 소리가 여의도에 울려 퍼졌다. 성인을 상징하는 비둘기 103마리도 계절의 여왕 5월의 푸른 봄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전 국민이 TV 생중계를 통해 그 감동을 생생히 느꼈다. 4박 5일 간의 교황 한국 사목 방문 일정 중 그야말로 하이라이트였다.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식이 거행된 서울 여의도광장(현 여의도공원)에서 100만 가톨릭 신자들이 태극기와 교황기를 흔들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환영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제공

아비뇽 교황 시대 이후 로마 밖 거행 첫 시성식

이승훈(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받고 돌아와 동료들과 자생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운 지 200년 만의 경사. 103위 시성식에는 한국 교회 ‘최초’ 성인 탄생과 더불어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다. 아비뇽 교황 시대(1309~1377) 이후 로마 밖에서 거행된 첫 시성식이기도 했다. 원래 시성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하는 것이 관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신자들이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 방한 일정에 맞춰 서울에서 시성식을 거행했다.

시성 명단에는 한국인 첫 사제(김대건)와 한국에 입국한 첫 프랑스인 선교사(모방 신부)도 포함됐다. 모방 신부 고향인 리지외교구장 장 바드레 주교는 프랑스 교회를 대표해 환영사를 했다. 103위 성인 중 10위의 모국인 프랑스는 가장 많은 순례단(320여 명)을 보냈다. 이들 가운데엔 성 다블뤼 주교와 성 도리·브르트니에르 신부 후손도 있었다.

시성식을 집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당시 한국을 방문한 첫 교황인 동시에 최초의 동유럽(폴란드) 출신 교황이었다. 교황이 입은 제의는 국가무형문화재 매듭장 고 김희진(율리아나) 명예보유자 작품이었는데, 재봉을 맡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다름 아닌 한국 최초의 방인 수녀회다.

시성식은 규모 면에서도 교회사와 한국사를 새로 썼다. 100명 넘는 대규모 복자가 한시에 시성된 것도, 국내에서 단일 종교 행사로 이처럼 많은 인원이 모인 것도 처음이었다. 봉헌금이 5억 7000여만 원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시성식 취재진도 무려 1000명이 넘었다. 국내 주요 일간지는 이날을 전후로 1면에 시성 소식을 특필했다. 과거 서울대교구가 운영한 ‘경향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언론은 신자들의 질서정연한 모습과 시성식 후 깨끗한 자리를 보고 감탄했다. 해외 가톨릭 언론들도 한국의 시성식 현장 소식을 크게 다뤘다. 이들은 1만 명이 넘게 순교할 정도로 박해받던 교회가 200년 만에 눈부신 성장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시성식에서 교황이 곤룡포를 본뜬 황금색 제의를 입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교황 방한 공식화보」(가톨릭출판사)에서 발췌.


한때 103위 성인 세례명 갖기 ‘열풍’ 불기도

시성식 직후 세계 교회는 103위 성인을 세례명으로 정하고, 축일(한국에서는 대축일)인 9월 20일 특별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국내에서는 한때 한국 성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거나, 이들을 본당 주보로 삼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 특히 수원교구 신장본당은 한국 성인 이름을 세례명으로 택한 신자 104명이 배출돼 화제가 됐다. 해외에서도 새롭게 탄생한 성인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시성식 이전부터 한국 성인 이름을 영문으로 보내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이에 한국 교회는 영어와 이탈리아· 프랑스어로 성인 약전을 발간해 해외로 보냈다.

하지만 오늘날 103위 성인 이름을 세례명으로 하는 경향은 확연히 줄어든 상태다. 최근 본지 자체 조사 결과, 한국 성인(복자 124위 포함) 세례명 중 주로 사용되는 것은 8개(성인 3위·성녀 5위)에 그쳤다. 103위 성인이 시성되기까지 많은 이들의 땀이 배어 있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103위 시성 과정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기적 증명할 자료 준비 부족으로 어려움 겪어

1983년부터 시성 청원인을 맡은 윤민구(수원교구 성사전담사제) 신부도 4월 24일 한국교회사연구소 공개대학 강의에서 ‘시성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가 성인과 복자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회법상 시성 절차는 시복 후 해당 지역 신자들이 복자를 공경하여 그 복자의 전구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근거로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당시 기적을 증명할 자료 준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윤 신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배려로 기적심사를 관면 받은 덕에 103위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배경에는 당시 시성성(현 시성부) 장관 고 팔라치니 추기경의 진심 어린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서울 여의도광장에 마련된 103위 시성식 제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교황 방한 공식화보」(가톨릭출판사)에서 발췌.


김수환 추기경, 교황 설득해 시성 명칭 변경

윤 신부는 시성 명칭이 정해지는 데도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전했다. 첫 명칭은 ‘한국의 라우렌시오 앵베르, 시메온 베르뇌 주교들과 김 안드레아 및 100위 동료 순교복자들의 시성건’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길고, 한국 출신임을 알리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한국 교회는 김대건 신부를 앞세우는 새 명칭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시성성은 “프랑스 출신도 한국 성인”이라며 국수주의를 용납할 수도, 주교를 제쳐둘 수도 없다고 반대했다.

이때 당시 해결사로 나선 이가 바로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시노드 참석 차 로마를 찾은 김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해 설득, 허락을 받았다. 김 추기경은 당시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에게 잘 알려져 있어 사목적으로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선교사의 이름이 부각되면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시작된 한국 교회의 특성이 퇴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또 한국 교회 특성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평신도 지도자인 정하상(바오로)을 명칭에 함께 넣는 것도 허락했다. 이로써 완성된 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4-04-30 오후 5:32:17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