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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5) 2024-04-18
막연함만 가득 안은 채, 약속의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의 행동 가운데 유독 두드러진 점은 그의 신뢰 가득한 모습이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창세 12,7-8)

아브라함은 먼 길을 떠나와 도착했던 곳에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른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신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안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 존재로 응답하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리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 뒤이어 곧바로 시련이 닥친다. 그 땅에 기근이 든 것이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나그네 살이 하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창세 12,10)

이는 창세기가 지닌 매우 역동적인 본문 구성이다. 아브라함의 신뢰 가득한 신앙의 모습에 이어 작은 빈틈의 여유도 없이 고통이 들이닥친다. 사실, 이것이 우리 삶이 아니었던가? 하느님께 든든한 믿음을 고백한 직후, 곧바로 무너짐을 체험했던 일이 과연 우리에게 한두 번 일어났던가. 사실, 우리가 크게 넘어졌던 그 순간은 자신의 믿음이 제법 성숙해졌다고 여기며 신앙의 삶이란 그런대로 살만하다고 되뇌었던 바로 그때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며 수 없는 질문을 연이어 던질 수 있다.

아브라함이 서 있는 그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던가?

하느님께선 그 땅과 함께 그에게 축복과 번성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과연 아브라함은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잠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자. 세례 받을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찬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면서 전보다 더 무거워진 삶의 시련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기면서 지녔던 깊은 믿음 뒤엔 언제나 그 끝을 알 수 없는 삶의 시련이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당최 믿음을 지니는 것 자체가 무겁게 느껴졌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아브라함의 체험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신앙의 경험들과 동일하다. 성경 본문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하진 않지만, 그는 분명 갈등했으며 고뇌했다. 이렇듯 아브라함 이야기가 전하는 하느님의 섭리는 더욱더 내면 깊숙한 곳으로, 인간 삶의 알 수 없는 어려움과 한계성 안으로 들어오신다. 

기근이라는 재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갔다.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이에게 말한다.(창세 12,12-13)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순명과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정작 이집트에 간 아브라함은 비겁하고 소심하며 자신의 삶을 위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성서학자 폴 보샹(P. Beauchamp)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누이, 즉 아버지의 딸로 소개하고 있다고 함은 아버지(고향)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심리를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이는 자신이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심리적인 후회(후퇴)를 의미한다.

결국, 아브라함은 다른 남자들에게 사라이를 내어주고 파라오는 그녀를 자신의 궁으로 부른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행동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하여 하느님의 계획 자체가 위험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라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임을 전하지만(창세 11,30), 하느님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번성하게 됨을 약속하셨다. 즉, 사라이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이을 수 있음이 하느님에 의해 암묵적으로 승인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고 다른 남자에게 내어주는 것은, 그가 후손 번성에 대한 하느님 약속을 믿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하느님의 섭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브라함 안에서 복잡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 이야기가 전하는 하느님 섭리의 진면목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던 이유는, 결국 그 섭리와 닿아 있는 인간의 삶을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조차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인생의 굽이마다 하느님의 섭리가 자리하고 있음은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다. 결국, 다시 믿음의 길이며 신뢰의 길이다.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는 파라오 (Pharaoh gives Sarah back to Abraham-Isaac Isaacsz)


글 _ 오경택 신부 (안셀모, 춘천교구 성경 사목 담당 겸 교구장 비서)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으며, 예루살렘 프란치스칸 성서대학에서 성서 고고학 디플롬(diploma superiore)을 이수했다. 춘천교구 묵호, 퇴계 본당 주임을 지냈으며, 현재 교구장 비서 및 교구 성경 사목 담당 소임을 맞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04-18 오전 8:12:1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