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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에 계시면서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 하느님 2020-04-08
 
▲ 그림=하삼두 스테파노

 

 


지난 호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성장에 있어 ‘어둔 밤’은 새로운 빛을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전(全)과 무(無)의 영성’ (Todo y Nada)과 토마스 머튼의 ‘모든 곳에(Everywhere) 계시면서 동시에 아무 곳에도(Nowhere) 계시진 않는 하느님’의 영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하느님은 모든 것이다” 혹은 “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라는 긍정 신학의 설명은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하느님은 무이다” 혹은 “하느님은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라는 부정 신학의 표현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하느님께서 아무 곳에도 계시지 않는 무(無)와 같다고 표현한 것일까? 실제로 하느님께서 무(無)일까?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

하느님은 충만함이면서 동시에 비움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초월적인 하느님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다 알 수가 없고 다만 계시해 주신 하느님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 하느님에 대해 알고 배우고 사랑하며 그분과의 일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하느님, 그동안 내가 만나지 못했던 하느님이 다가왔을 때 그것은 나에게는 ‘어둔 밤’이나 ‘무(無)’와 같이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낄 뿐 혹은 내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 실제로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동안 체험하지 못했던 하느님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토마스 사도처럼 자신의 논리로 의심하거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유다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 만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 영적인 새로운 탄생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알지도, 체험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하느님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인 성장이요 변화이다.



영적 어둠은 새로운 주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

신앙생활에서 ‘어둔 밤’, ‘막다른 골목’, ‘사막과 광야’와 같은 시간은 다른 한편으로 볼 때에는 새로운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여정의 일부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으며,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셨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어둔 밤’을 거쳐 부활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 삶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영적 어둠 역시 새로운 주님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요, 영적 재탄생을 위해 필요한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사실 캄캄하고 무서운 영적 어둔 밤 속에서 새벽을 기다린다는 것, 혹은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듯 헤매며 오아시스를 찾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디어 내야 하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암탉이 알을 품고 있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내가 아직 자라지 않았을 때 깨어진 알은 생명으로 태어나 자랄 수 없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어둠 속에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성장은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듯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깊이 체험한 바오로 사도도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라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 내려놓을 때 ‘은총의 비’ 내려

여기에 바로 은총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은총의 비가 우리에게 내린다. 때로는 하느님의 은총의 비는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둠에 작은 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라고 고백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처럼 머튼의 영적 성장과 변화의 여정은 그가 어떻게 죄와 방종의 시간을 지나 자신이 무너지는 어둠을 극복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고, 어떻게 그 은총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며 진정한 영적 성장과 변화의 삶을 살았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 호에서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가톨릭평화신문 2020-04-08 오후 2:42:00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