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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2020-04-08


▨ 최지혁(요한, 1808~1878)

최지혁은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할아버지 때에 이미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익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선일(善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의 두 아내 박막달레나와 이아기(루치아), 세 딸 부부도 1878년 순교했다.

최지혁은 1846~1847년께 다블뤼 신부를 만나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충청도 홍주에서 살다가 1866년 병인박해를 겪었다. 그는 박해가 극심해지자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려고 장치선, 김계쇠(베드로)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마련해 1866년 7월 1일 리델 신부를 모시고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향했다.

그는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 상해에 머물면서 같은 해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으로 동행했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가 2년 가까이 생활했다. 그런 다음 그는 1868년 7월께 조선에 재입국할 방도를 모색하던 리델 신부의 제안에 따라 귀국했다.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리델 주교가 주도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 편찬에도 힘을 보탰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그가 귀국하기 직전에 체포돼 그의 아내 박막달레나와 세 딸 부부가 모두 순교했다. 그래서 최지혁은 귀국한 뒤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이아기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1870년 3월 2일 최지혁은 충청도를 출발해 9월 30일 중국 차구(현 요녕성 대련 장하시 용화산진)를 거쳐 상해로 가서 리델 주교를 도왔다. 그러다가 1872년 5월 귀국한 뒤 중국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소식을 전했고, 1875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새로 조선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최지혁은 이에 서울 서대문 밖 고마청동(현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에 집을 마련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1876년 5월 8일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를 모시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또 1877년 9월 23~24일에는 리델 주교, 로베르 신부, 두세 신부 등을 황해도에서 맞이한 뒤 리델 주교와 함께 서울 고마청동에 안전하게 모셨다.

그러나 리델 주교의 입국 사실은 곧 탄로가 났다. 중국으로 보낸 교회 밀사가 국경에서 체포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체포령이 내려졌고, 최지혁은 리델 주교, 아내 이아기와 함께 1878년 1월 28일 포교들에게 잡혀 우포도청에 압송됐다. 그런 후 얼마 안 돼 좌포도청으로 이송됐다. 최지혁은 좌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지금 배교한다고 해서 어찌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오직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며 굳게 신앙을 증거했다.

최지혁은 오랫동안 옥살이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늙고 병든 그에게 이러한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죄수들은 몹시 굶주려서 보름 후에 보았을 때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천주교인들은 옥에서 병을 앓아도 어떤 혜택을 받지 못했다. 차꼬도 벗지 못한 채 그저 심지가 꺼지듯 생명이 꺼지도록 놔두었다가 죄수의 마지막 숨을 거두면 그제야 차꼬를 벗겨냈다. 하지만 최지혁은 이러게 험한 옥살이 중에도 기도와 묵상을 멈추지 않았으며 틈틈이 옥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리델 주교가 중국으로 추방된 지 한 달 뒤인 1878년 7월 14일 포도청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0-04-08 오전 9:42:02 일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