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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복음] 주님 부활 대축일 - 새로운 부활의 증거 2020-04-08
▲ 임상만 신부



언젠가 석가모니를 화장(다비)했던 자리에서 석가모니 유해가 발견되었다며 인도를 위시한 불교 국가에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 후 발굴된 유해들은 잘 정돈되어 신도들을 위해 시가 행렬을 했고, 수많은 사람이 유해가 지나갈 때 땅에 엎드려 절하며 믿음을 드러냈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가톨릭 사제가 나직이 말했다. “만약 예수님 무덤에서 뼛조각이 하나라도 발견되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미 산산조각이 났을 텐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

오늘 복음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텅 빈 무덤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완벽한 증거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무덤이 비어있으니까 예수께서 당연히 부활하신 것이라는 이 논리는 부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차라리 교회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빈 무덤 소식을 들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소식을 전한 막달라 마리아마저도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라고 보지 못하고 단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며 걱정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빈 무덤을 보고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다수가 증언하는데도 절대로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어떤 이유로 부활을 확신하고, 노래하고, 증거하다 죽어갔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부활을 믿게 한 엄청난 증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부활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부활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주관적인 체험으로써 그 부활의 증거를 수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빈 무덤에서 우리가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부활 믿음이 시작되고, 그 빈 무덤에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실 때 부활을 깨닫게 되며, 예수님께서 쪼개어 주시는 빵을 나누어 받을 때 그 부활의 진실을 보고 깨닫게 되는 부활 신비의 출발점이 빈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부활을 노래하는 이 시기에 주님의 부활이 모든 이에게 전달되고 그들 또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새로운 부활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삶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사도들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으며, 사도들의 전교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빈 무덤 대신에 우리가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되어 부활을 선포하고,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세상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절망의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주님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고 위안을 느끼며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야 한다.

이제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빈 무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사실 증거를 보았다고 해서 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장 먼저 빈 무덤에 들어가 보았고 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성큼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객관적인 증거나 목격으로 누구나 증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 안에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 부활을 증언할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로 변화된 모습이 가장 강력한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으로 부활을 증거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부활의 증거가 되고 부활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빈 무덤도 절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임상만 신부(서울대교구 상도동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20-04-08 오전 9:42:02 일 발행 ]